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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깡 - 손이 가요, 손이가, 새우깡에 손이 가요~

국민스낵 새우깡 

 

 

 

 

 

 

 1971년 4월에 열린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해 8월 경기도 옹진군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특수부대원들이 서울로 진입해 군·경과 교전한 사건이 발생했다. 해외에서는 미국 탁구 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핑퐁 외교’가 시작됐으며, 10월 25일 제 36차 유엔 총회에서 중국은 유엔에 가입하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됐다. 농심 새우깡은 이렇듯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1971년 12월 서울 대방동 공장에서 태어났다. 국내 최초의 스낵이 만들어진 순간이다.

“손이 가요, 손이 가, 새우깡에 손이 가요~.”

CM송처럼 농심 새우깡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올해로 출시 44주년을 맞은 새우깡은 1971년 출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새우깡 고유의 맛은 변함이 없다.

 수명이 짧게는 3개월, 길어야 5년 가기가 힘든 스낵 시장에서 지난 44년 동안 꾸준한 인기를 누려온 새우깡은 국내 스낵 문화를 꽃피운 ‘스낵의 원조’이며, 길이 50mm, 폭 10mm, 두께 5mm의 새우깡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으로 한국인의 손과 입을 즐겁게 했다.

지난해까지 국내 스낵 최초로 누적판매 76억 봉을 돌파하며 국민스낵의 위용을 떨쳤다. 이는 우리나라 국민 1인당 152봉지를 구매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새우깡은 연간 700억 원의 매출로 스낵시장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닌 전 세계 75개국에서 매년 900만달러 상당이 수출되고 있다.

 

 

새우깡 개발에만 트럭 80대분의 밀가루를 사용하다 

“새우는 소금 구이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새우를 빻아 밀가루와 섞은 다음 소금 등 짭짤한 양념으로 만든 새우깡은 그래서 맛있다. 간식거리가 많지 않던 1970년대, 새우깡은 우리 민족 고유의 간식인 뻥튀기에서 착안해 만들었다.”고 관계자는 설명한다.

쌀이 부족했던 당시 농심은 밀가루를 이용한 과자 개발에 착수했다. 단백질과 칼슘이 풍부한 새우가 재료로 선정됐고, 개발을 위해 4,5t 트럭 80대분의 밀가루가 사용됐다고 한다. 온도를 잘못 맞춰 수천 번을 태우고, 먹기에 적당한 강도를 유지하기 위한 실험만 수백 번을 되풀이 했다.

기계를 만드는 데는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신춘호 회장이 공장 옆에 가마니 거적을 깔고 잠을 자면서 개발을 독려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런데도 2005년 1월 일본의 한 민영방송은 새우깡이 일본의 과자를 모방한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새우깡은 엄선된 규격의 신선한 꽃새우를 사용하고 있으며 봉지당(90g 기준) 생새우 4마리가 들어가 있다.

새우깡의 제조 공정은 크게 8단계로 나눠지는데 이 과정중 가장 중요한 ‘파칭(parching)'과정을 거친다. 파칭이란 기름대신 뜨거운 소금의 열을 사용해 과자를 튀기는 방법이며, 이 과정을 통해 기름으로 튀기지 않고도 담백하면서도 바삭바삭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회사 관계자는 말한다.

새우깡의 빗살 무늬는 새우의 마디를 형상화한 것뿐만 아니라 표면적을 넓혀 건조시키기 좋게 함으로써 새우깡을 바삭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순박하고 대중적인 브랜드명이 성공 요인

‘새우깡’이라는 이름은 농심 신춘호 회장의 막내딸 윤경 씨가 네 살 때 <아리랑>의 가사를 “아리깡”으로 발음한 데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또한 깡보리밥을 연상시키는 ‘깡’에 담겨 있는 순박하고 대중적인 이미지는 제품명으로 손색이 없다는 판단을 주었다. ‘깡’은 이후 감자깡, 고구마깡, 양파깡에도 이어졌다.

별다른 군것질 거리가 없던 1970년대, 새우깡은 나오자마자 인기를 끌었다. 파칭 공법을 사용함으로써 기름기 없이 담백하고, 새우의 맛과 향을 살릴 수 있었던 게 사람들의 입맛을 끈 주요 원인이었다. 첫 해 20만 6,000박스였던 생산량은 다음해 425만 박스로 껑충 뛰어, 주력 분야였던 라면에서 경쟁사 삼양에 밀려 어려움에 처했던 회사의 경영상태도 좋아졌다. 새우깡은 1986년 ‘신라면’이 나오기 전까지 농심의 매출을 주도했다.

새우깡의 인기가 높아지자 1970년대 후반부터 새우를 원료로 하는 유사 스낵들이 등장했다. 농심은 포장에 ‘원조’라는 표시를 써 넣는 응급책을 마련했지만 새우깡의 포장 디자인과 로고까지 모방한 제품을 막을 수 있는 근본 대책은 아니었다. 농심 관계자는 “1986년 법원에 부정 경쟁행위 중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해 승소, 모든 모방 제품이 전량 수거돼 폐기 처분됐고 이후 승승장구했다”고 전한다.

 

 

새우깡이 담긴 이야기 공모전, 이색 마케팅

새우깡은 늘 서민과 함께해 왔다. 농심은 지난 2001년 새우깡 탄생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새우깡에 관한 재미있는 경험이나 사연을 담은 ‘새우깡 이야기’ 공모전을 펼쳤다. 총 6,300여명이 응모, 94편의 수상작이 선정됐다. 이 중 은상을 수상한 이수경씨의 <새우깡으로 끓인 해산국>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가 동생을 낳았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필자가 새우깡을 물에 넣고 국을 끓여드렸다는 사연이다.

동상을 탄 <새우깡이 깨질까봐 당신에게 안겼는데.....>는 새우깡 때문에 결혼을 한 이야기다. 수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필자가 사다리를 놓고 선반을 정리하던 중 사다리가 넘어져 선반에 매달린 채 도움을 요청했는데, 슈퍼마켓 안에 한 남성이 새우깡 박스를 발밑에 쌓아줘 밟고 내려올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새우깡이 부서질 것을 우려한 필자는 그 남성의 품에 안겼고, 이것이 연인이 돼 결혼에 이르게 됐다는 내용이다.

강화도에서 낚시를 하다 미끼가 다 떨어져 새우깡을 사용했는데, 72cm짜리 숭어가 잡혔다는 즐거운 사연이 있는가 하면, 어렸을 때 자신의 새우깡을 먹어치운 애완견에게 연필을 던져 한쪽 눈을 멀게 했고 그 강아지는 다시는 새우깡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이처럼 새우깡은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하고 신뢰를 구축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 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모델은 바뀌어도 CM송은 바뀌지 않는다  

 

 

 

 회사 관계자는 “손이 가요”로 시작되는 CM송을 비롯한 광고를 새우깡의 장수 비결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1991년 9월 6일 첫 전파를 탄 CM송은 유명 카피라이터 이만재씨의 가사에 윤형주씨가 곡을 얹은 것이다. 1998년 인기 그룹 S.E.S, 2002년 그룹 신화를 광고 모델로 기용해 젋은 층을 겨냥하면서도 같은 CM송을 유지해 중·장년층의 향수도 끌어모았다.

모든 자수 브랜드가 마찬가지겠지만 새우깡도 오래되고 낡은 이미지를 벗어나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새우깡은 100년 브랜드로 가기 위해 시대의 흐름을 따르고 젊은 층에 다가서는 광고와 디자인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매운 새우깡, 쌀 새우깡 등 차별화 된 맛을 개발한 예가 이 같은 변신의 노력이었으며, 가장 최근 광고에서는 국민첫사랑 미쓰에이의 ‘수지’와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등에서 주연을 맡은 인기배우 ‘이종석’을 광고모델로 기용하면서 새우깡의 입지를 굳혔다.

 

회사 관계자는 ‘스낵의 원조로서 스낵 시장의 변화는 새우깡이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지만 새우깡에는 새우가 들어 있다. 국내에서 스낵하면 새우깡이 빠지지 않는다. 새우깡은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채워주고, 젊은이들에게는 ‘입 속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국의 대표적 간식거리로서의 자리를 지켜나가겠다’고 말했다.

 

 

[출처] 글로벌 브랜드를 꿈꾸는 한국 최고의 브랜드 - “오랜 사랑의 비결은 꾸준한 자기 혁신” 김승범

[작성] 한국브랜드경영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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