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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스활명수 -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국민소화제



 

 


 

‘1897년생, 아스피린과 동갑.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 이 말이 동화약품의 부채표 활명수에 대한 설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부채표 활명수는 11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최고의 브랜드이며 한국인에게 너무나 친숙한 활명수는 지금까지 83억 병 이상 팔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상품이다. 바이엘사가 아스피린을 처음 만든 때도 1897년이었다.

 

 

국내 최초 상표 등록

 

동화약품은 4가지 부문에서 한국기네스북에 올라있다. 먼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업체이자 제약회사로 조선말기인 1897 9 25동화약방으로 출발하였으며 국내에서 창업 1세기를 넘긴 기업은 두산그룹(1896년 창업), 조흥은행(1897년 창업), 동화약품 등이다. 이 중 조흥은행은 신한금융지주회사에 편입됐고, 두산그룹은 상점이 모태가 됐던 것에 비해 동화약품은 창업 이후 줄곧 제약업만을 고수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최장수 의약품인 활명수와 가장 오래된 상표인 부채표가 올라 있다. 1897년 처음 생산된 활명수는 1910 12월 조선총독부 특허국에 등록한 가장 오래된 등록 상품이며 부채표는 1910 8월 국내 최초로 등록한 상표다. 부채표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에 나오는 紙竹相合 生氣淸風(지죽상합 생기청풍-종이와 대나무가 만나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 에서 유래한다.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던 1897년 궁중의 선전관(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으로 있던 민병호 선생이 당시 궁중에서 사용되던 생약의 비방을 일반 국민에게 널리 보급한 것이 활명수다. 활명수는 소화에 도움이 되는 생약 성분을 서양의학에 접목시킨 것으로, 말하자면 그 시대의 신약인 셈이었다. 위 속의 음식물을 직접 삭이는 것이 아니라 위 신경을 자극해 정지 상태에 있는 위를 다시 활동하게 하는 원리다. 급체와 같은 소화불량에 신통한 효력을 지닌 활명수는 <동의보감>에도 없는 비방이며 한국 바이오테크의 시초이다. 당시 약이라고는 달여 먹는 탕약밖에 몰랐던 시기이고, 약을 구하기 힘들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소화불량에 효과가 있으면서도 복용이 간편한 활명수는 그 이름인 목숨을 살리는 물로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또 구한말 한국을 방문했던 여행가 비숍은 한국사람들이 활명수를 만병통치약으로 먹었다고 묘사했다. 활명수는 외국인 눈에도 띌 만큼 백성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활명수를 만들었던 11가지 생약 성분은 지금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체했을 때 마시는 가장 대중적인 약 

 

<민강 사장>

 1897년 민병호 선생의 아들 민강 씨가 세운 동화약방이 동화약품의 모체이며, 이 동화약방을 통해 활명수가 대중화됐다. 전국에 지점이 설립됐고 특약점은 만주까지 퍼져있었다. 지금과 같은 약국이 없었던 때 사람들은 동화약방 지점에서 활명수를 살 수 있었다. 당시 60ml짜리 활명수 한 병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먹을 수 있는 수준의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한 번 사면 아껴두고 속이 답답하거나 급체했을 때만 먹었다고 한다. 현재 가격은 900으로, 대중적인 상비약이 됐다 


독립운동 연계, 한국전쟁 등 위기 넘어 활명수로 회사를 살리다

활명수는 100년 넘도록 이어 내려오면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19년 동화약방의 민강 사장이 독립운동과 관련해 일본에 체포됐다.

<서울연통부 기념비>

당시 동화약방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 연락기관인 서울연통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1995, 광복 50주년을 맞아 동화약품 부지에는 서울연통부 기념비가 세워졌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건너갈 때 돈 대신 활명수를 휴대했다가 현지에서 비싸게 팔아 자금을 마련하곤 했다고 한다. 민강 사장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회사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일제는 동화약방에 대한 허가 약품을 87종에서 24종으로 대폭 줄였으며 활명수의 판매도 주춤해져 갔다.

 

민강 사장이 세상을 떠나자 회사는 더욱 어려워지고 활명수 판매량은 연간 30만 병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던 1937, 민족 기업인인 윤창식 사장이 동화약방을 인수하면서 활명수는 한 고비를 넘기게 된다. 윤창식 제5대 사장이 현대적인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면서 1930년대 후반에는 한 해당 500만 병이 팔리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만주에 지점을 설립했다. 당시 선금을 예치하고도 제품을 구입하기 힘들 정도로, 활명수는 없어서 못파는 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분단이 되면서 북한지역의 생산 시설과 시장을 잃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는 기차에 원료와 기구를 싣고 마산으로 피난, 계속 약을 생산하려 노력했지만 서울 사옥이 파괴돼 활명수 생산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1950년대 기계를 새로 들여오는 등 복구 노력 끝에 1961년 동화약방은 매출액 1억 환을 돌파하였으며 1962년에는 사명을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바꾸고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활명수는 그 오랜 역사만큼 유사품도 많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여왔다. 1910년대에도 활명회생수, 활명액, 생명수 등 60여 종의 유사품이 난립하여 1919년에는 유사 상표 방어용으로 활명액을 상표로 등록하기도 했지만 이들 제품은 활명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경쟁 브랜드의 도전에도 시장 점유율은 그대로다

1965년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다. 계피, 아선약(인도산 콩과 식물의 즙액으로 만든 생약)등에 탄산가스를 섞은 까스명수(삼성제약)’가 활명수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당시 인기를 끌던 청량음료에 탄산가스가 들어 있는 것에 착안, 한약 맛을 없애고 청량감을 주면서도 소화 효과가 빨리 나타나도록 만든 것이다. 동화약품도 1967, 관리비를 제외한 제조 원가는 병단 14원이었는데 생산자 가격이 병당 9원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경쟁이 치열했던 1968~1970년 사이 두 회사는 총 광고비 지출의 절반 이상을 활명수와 까스명수 선전에 충당했을 정도다. 동화약품에 따르면, 1969년 까스활명수는 5,870만 병을 생산해 까스명수(4,500만병)를 따돌렸다. 현재 생약 성분의 액제 소화제로는 까스활명수, 까스명수 외에도 위청수(솔표 조선무약), 속청(종근당), 생록천(광동), 생단액(일양) 등이 있지만 현재 소화제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제품은 단연 까스활명수다.  

 

 

 

 

광고전략으로 브랜드 포지션 굳히기

1990년대 동화약품은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다라는 광고로 차별화에 나서며 명성 굳히기에 들어간다. 홍보실 관계자는 부채표를 강조한 광고 전략이 주효했다고 말한다. 이렇듯 수차례의 위기 속에서도 100여 년 동안이나 명맥을 유지하고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제조방식이나 약효의 개선은 물론이고 전통이 주는 신뢰의 바탕 아래 시대 감각에 맞는 마케팅 전략 또한 장수 비결로 꼽힌다. 소주업계의 판매 경쟁이 치열했던 1960년대, 진로 소주 영업판촉팀은 판촉 활동의 일환으로 술집을 돌아다니며 진로소주에 활명수를 타서 마시는 시범을 보였다. 소주의 쓴 맛을 없애주고 색깔을 노르스름하게 해 마치 양주를 마시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활명수 칵테일’은 주당(酒黨)들의 화제로 떠올랐다.  

 

 


<제약사 최초의 애니메이션 광고>

 

1965년 제약회사 최초로 애니메이션 광고를 내보냈고, 1974년 시원한 계곡물을 배경으로 한 광고는 중앙광고대상 컬러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부채표를 부각시키는 광고로 눈길을 끌었다. 건강을 중시하는 웰빙 바람에 맞춰 활명수의 몸에 좋은 11가지 생약성분을 강조했고 소화기능이 왕성한 10~20대보다 소화기능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하는 30대 이상부터를 주 타깃으로 잡은 것도 특징이다.  

 

 

 한국트렌드연구소장 김경훈씨는뜻밖의 한국사에서활명수는 한국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브랜드로 남아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체의학이 양의학과 한의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21세기의 새로운 의학으로 각광받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궁중의 전통 비방과 양의학을 접목시켜 만든 활명수는 이미 100년 전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두 세기를 넘어 장수하고 있는 셈이라고 활명수를 평가한다.

 

 

 

 

 

 

 

 

 

 

 

 

 

 



오페라 음악이 흐르고 삼각김밥과 햄버거가 갈색 액체에 의해 날아가는 광고.

 

동화약품의 까스활명수 광고로 재미를 버무린 대표적인 의약품 광고입니다. 삼각김밥이 날아가는 모습이 재미를 주는 동시에 '빠른 소화엔 활명수'라는 문구가 소비자들의 뇌리에 박힙니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동화약품은 그 동안 동시대와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신선한 크리에이티브를 접목한 활명수 광고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이번 광고 역시 소화제에 대한 젊은 층의 욕구와 그들의 트렌드에 부합하는 참신함과 독특함으로 다시 한번 주목받을 것"이라며 새로운 마케팅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발매 2세기에 접어든 활명수는 서민들의 아픈 배를 가라 앉히는 국민소화제로서, 활명수의 역사는 한국 제약의 역사와 한국 제조업의 역사와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축전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신구(新舊)의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100년이 기대됩니다.

 

 

 

 

 

 

 

 

 

[출처] 글로벌 브랜드를 꿈꾸는 한국 최고의 브랜드 - “서민의 아픈배를 달래주는 국민소화제:까스활명수” | [작성자] 한국브랜드경영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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